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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협회에서 실시한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조사 결과. 삼성전자는 '가장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 중 1위를 차지했다.
ⓒ 마케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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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취업준비생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은 어디일까? 대부분의 독자들은 눈치 챘을 것이다. 바로 삼성전자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한국 마케팅협회가 6대 광역시 4년제 대학생 1만1425명을 대상으로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을 조사한 결과다.

조사 당시는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경제민주화가 주요쟁점으로 떠올랐던 시기였다. 가격담합과 부의 세습에 대해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삼성의 개혁을 요구했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직업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의 수많은 사연이 소개되고 불산 유출로 삼성에 대한 전 국민적 지탄이 쏟아지기도 했다.

'삼성 공화국'의 이중적인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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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삼성공화국 2012년 12월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삼성 특집기사.
ⓒ 워싱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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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워싱턴포스트>는 '대한민국, 삼성공화국'이라는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국내총생산의 20%를 담당하며 "한국의 수출, 세입, 고용에 막대한 기여"를 자랑하는 삼성이 정부와 비등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법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한국사회의 비판적 목소리가 해외에도 전해졌다.

당시 기사에서 "재벌은 싫지만 내 자식은 재벌 기업에서 근무했으면 한다"는 심리가 "한국인들의 이중성"이라고 지적한 전국경제인연합회 간부의 인터뷰가 폐부를 찔렀다. 쏟아지는 비난에도 어째서 삼성이 한국인들에게는 '도덕'이고 '인격'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고백건대 나 역시 그런 이중적인 대한민국 국민의 하나였다. 지금은 작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내 동생이 몇 년 전 강북삼성병원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그 순간을 기억한다. 마치 나의 실패처럼 아쉬웠다. 동생 덕분에 나도 '삼성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 때문이었을 게다.

그런 나의 '환상'을 깨부순 책이 있다. 바로 23년간 근무하던 삼성에서 해고당한 박종태씨의 구술기록, <환상>(박종태 구술·김순천 정리·오월의 봄 펴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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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가 모델로 나온 삼성전자 에어컨 광고.
ⓒ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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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환희에 가까울 정도로 기쁨이었지만 마지막 모습은 나를 당황하게 할 정도로 그들이 선전해온 '글로벌 삼성'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삼성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광고에 나오는 김연아의 삼성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하나의 데커레이션(decoration·장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본문 중에서)

박씨와 삼성과의 만남은 '환희에 가까운 기쁨'이었다가 '차갑고 잔인하게' 끝났다. 입사 23년만이었다. 2010년 11월 26일, 그는 관리직원들에게 사지가 들려 회사 출입문 밖으로 쫓겨났다. 그의 해고 사실에 직원들이 동요할까 우려한 사측은 동료들과의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서 휴게실 냉장고에 보관하던 약 봉지를 가지러 가겠다는 박씨의 요청에 관리자는 직원들을 시켜 800리터 양문형 냉장고를 직접 가져왔다.

삼성전자 측이 박씨를 해고한 사유는 업무지시 불이행과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그리고 정보보호규정 위반이었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의 해고가 노동조합을 건설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관련기사 : 노조 글 15분 만에 삭제..."그래도 포기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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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해고노동자의 기록 <환상> 책표지
ⓒ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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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의 시골마을에서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에 삼성에 입사했을 때 박씨는 세상을 다가진 것 같았다. VD(영상디스플레이) 제조그룹에서 9년을 일하고 지원부서 엔지니어로 발탁될 만큼 회사로부터 능력도 인정받았다. 23년 동안 지각 한 번 없었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경기대 지식재산학과에 합격해 5년 만에 학위를 받을 정도로 성실했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은 희망퇴직, 제조라인 여성들의 유산, 성과급 차별, 강제 전환배치, 상사의 폭언 등 삼성 내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고 겪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략) 현실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진 방법은 2년에 한 번씩 있는 '한가족협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선출되는 것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일갈은 삼성의 무노조 경영의 상징이었다. 그의 아들 이건희 회장은 창업자의 눈에 흙이 들어가고도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삼성은 '한가족협의회'라는 노사기구를 통해 노동자들을 관리했다. 근로자 협의위원이 회사의 구조조정에 합의하고 그 대가로 국무총리상을 받는 행태에 분노한 박씨는 2007년 소속 부서 동료들의 지지 속에 '한가족협의회' 근로자 협의위원에 당선된다.

목표만큼 살빼지 못하면 벌금 걷는 '개인관리프로그램'

"차분히 달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울음부터 터트렸다. '우리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냐고요!' 삼성 제조 여사원들은 이렇게 세상에 대고 몸부림치면서 절규하고 있었다. 제조그룹의 컨베이어 라인이 셀 라인으로 바뀐 뒤 일의 강도가 두세 배 높아지며 나타나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책 <환상>은 초일류 글로벌 기업 삼성의 이면을 가감 없이 폭로한다. 상시적 구조조정과 고과경쟁은 조립라인의 여성노동자들을 유산으로 내몰았다. 체중관리와 어학능력 목표에 미달하면 부서에서 벌금을 걷어가는 삼성전자의 '개인관리 프로그램'을 마주했을 때는 수많은 학생들의 자살을 불러온 카이스트의 징벌적 등록금이 떠올랐다.

<환상>을 읽다 보니 자기계발의 압박에 시달리며 학원등록에 중독된 샐러던트(샐러리맨+스튜던트)의 기원이 삼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은 이미 10년 전부터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 경쟁질서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삼성에 다닌다고 하면 월급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지만, 그것은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사실 삼성은 기본급이 매우 낮아 타사보다 연봉이나 퇴직금이 매우 적었다. 2012년 상반기 삼성전자는 매출 1위를 달성했지만 대졸 초임연봉에서는 1000대 기업 중 201위에 불과했다."(본문 중에서)

성과급 수십억 원의 임원들 덕분에 삼성 직원들의 평균연봉은 6000~7000만 원으로 소개된다. 너도 나도 앞 다퉈 삼성입사를 꿈꾸는 이유다. 그러나 박씨는 삼성의 고액연봉은 또 하나의 '환상'이라고 폭로한다. 급여명세서에 따르면 실제 입사 23년 차 박씨의 기본급은 190만 원(2010년 11월 기준)이었다.

총 급여 340만 원 가운데 50% 가까이가 PS(Profit Sharing·초과이익분배금)이다. 기본급을 적게 책정하는 대신 회사의 전체실적에 따른 초과이익을 부서별로 등급을 매겨 차등으로 배분하는 방식이다. 박씨는 PS를 "동료들 사이의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실적 만능주의와 일등 독식주의의 성과급 이면에 시급제 고졸사원처럼 기본급이 100만 원에 못 미치는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장실벽에 쓰인 낙서에도 필체 조회 들어가는 기업

"사원·국민·국가가 아닌 이건희 일가를 위한 삼성의 시스템에서 공포에 시달린 사원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한 번은 누군가 회사 화장실 벽에 이건희를 욕하는 낙서를 했는데, 회사에서 필체를 조회해서 그 사람을 금세 잡아냈다."(본문 중에서)

박씨는 동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다. 사측 임원은 그의 활동을 두고 "사원들을 지나치게 대변한다"며 못마땅해 했다. 결국 그는 2009년 2월 9일 한가족협의회 협의위원에서 강제 면직당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삼성의 절대 성역을 건드린 탓이었다.

그는 2008년 12월, 모두의 기대와 달리 3000억 원 적자를 기록한 VD사업부의 실적에 의문을 품었다. 사측에 3000억 원 적자의 이유를 공개하라고 따졌다. 그가 면직당하고 곧이어 삼성의 후계자 이재용 전무는 5000억 원의 재산분할을 조건으로 이혼소송을 제기한 그의 배우자와 이혼에 합의했다.

"부서장은 어이가 없어 멍해진 나를 부르더니 '다른 사원들은 자율출근제지만 당신은 오전 8시에 나와서 오후 5시까지 앉아 있다가 퇴근하라'고 했다. (중략)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으니 직원들이 일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성실하게 컴퓨터 타이핑치는 소리, 물건을 갖고 부지런히 오가는 발소리, 열심히 자료를 넘기는 소리들이 모두 또렷이 들려왔다."(본문 중에서)

삼성의 실체와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박씨의 상처도 깊어졌다. 협의위원에서 면직당한 이후 박씨는 최지성 사장을 상대로 징계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사측은 그의 법정투쟁을 막기 위해 해외출장을 명령했다. 건강을 이유로 해외출장을 미뤄줄 것을 요청한 그에게 삼성은 직무정지로 답했다.

외국 기자도 놀란 삼성의 '왕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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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사 온라인 사내 게시판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을 올린 뒤, 업무지시 거부와 허위사실 유포 등의 이유로 해고된 박종태씨. 사진은 지난 2010년 12월 27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삼성의 노동조합 설립 탄압규탄 및 삼성전자 박종태씨 해고무효확인소송 소장제출 기자회견' 당시 모습. 박종태 대리가 직무대기 처분을 받았을 당시, 컴퓨터도 없는 빈 책상에서 사내 메일도 사용할 수 없게 차단된 '왕따 직원' 생활을 하는 박 대리의 모습이 뒤로 보인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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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을 넘는 시간동안 빈 책상에 앉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 그는 그때부터 눈물이 많아졌다고 한다. 직무정지 당시 동료가 그를 촬영한 사진에는 빈 책상에 앉아 파티션을 바라보는 그의 처연한 모습이 담겨 있다. 그의 사연을 취재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기자가 그 사진을 보면 외친 첫 마디가 "오 마이 갓"이었단다.

"삼성에서 너무 많은 일을 겪는 과정에서 나는 한가족협의회의 한계를 명확히 느낌과 동시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회사와 의견이 충돌할 때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아무 수단도 없이 오직 회사의 시혜만을 바랄 뿐이었다."(본문 중에서)

박씨는 결국 협의위원으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1%라도 개선하고자 노력했던 자신의 생각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회사 연수원의 컴퓨터를 이용해 사내 온라인 게시판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글은 15분 만에 삭제당했다. 그가 글을 올린 '라이브 2.0'은 2010년 최지성 당시 삼성전자 사장이 만든 '사원들과의 소통을 위한 공간'이었다.

"나는 삼성의 인사노무관리 방식이 조금이라도 변하기를 원했고, 그래야만 다른 기업들도 따라서 변한다고 생각했다. 법정에서 이기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근거 자료만 남기는 것만도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잘못되었더라도 판결문이라는 자료는 남는다. 후배법조인들로 하여금 '분명히 잘못된 일인데 왜 이런 판결을 내렸을까 하고 생각하게 할 근거를 남긴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벌이는 싸움은 유의미한 것이었다."(본문 중에서)

삼성의 '환상'에서 벗어나 본질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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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18일, 삼성노조가 출범 1년 맞아 서울 강남역 삼성사옥 앞에서 기념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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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환상>에는 '삼성이 무노조 경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탄압한다'는 주장이 가득 담겨있다.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박씨의 억울함이 뚝뚝 배어났다. 꼼꼼히 정리해 덧붙인 박씨의 증거 자료와 김순천 르포작가의 섬세한 정리는 박씨의 절규를 우직한 울림으로 바꿨다.

"삼성은 중소기업을 위한 국가 지원금이 얼마인지까지 계산해서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흡수하고 있었다, 휴대폰 가격을 해외보다 2~3배 높게 책정해서 많은 국내 소비자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듯이 말이다. 2009년 이후 20~30조 원에 이르는 환율 효과, 정부의 R&D 투자지원, 세계 최저 수준의 법인세율 등을 따지면 삼성이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이 삼성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무노조 성지' 삼성에서 노조 건설을 호소한 그의 싸움은 결국 해고로 끝났다. 해고 무효소송에서도 패소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금속노조 경기지부 삼성지회소속으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800일이 넘는 삼성과의 싸움은 이제 하나의 기록이 됐다. 그의 기록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것이 삼성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본질을 똑바로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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