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공정한 언론이라는 평을 듣는 한 일간지가 '상생의 기업경영'이라는 주제로 야심찬 기획기사를 시작하면서 "새해를 맞아 노동자도 사용자도 갈등과 대립에서 벗어나 대화와 타협으로 '함께 사는' 틀을 찾아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노사가 지금처럼 자기 몫 지키기만 고집한다면 그 길은 멀고도 멀 수밖에 없다"고 썼습니다.

이 말은 얼핏 흠 잡을 데 없이 들리지만, 자세히 보면, 노사가 서로 대등한 입장일 때에만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노사관계의 책임이 노사 양쪽에 공히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갈등과 대립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자기 몫 지키기에만 열심인 편이 어느 쪽인지 위의 표현만으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중요한 계획을 추진 중이던 노동조합이 한 동안 연락을 끊었다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그 저간의 사정은 이랬습니다.

회사가 갑자기 "조합원 다섯 명을 해고하겠다"고 노동조합에 통보했습니다. 정당한 사유를 묻는 노조 간부에게 회사 인사노무관리자는 "일단 해고하고, 몇 년 뒤 그 사람들이 대법원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으면, 그때 돈으로 해결하겠다"고 답했습니다.

며칠 뒤 회사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 회사가 후보를 내보내는 선거구에 노동조합측이 후보를 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지금 추진하는 다섯 명에 대한 해고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해고 운운하던 처음부터 회사의 목적은 바로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였습니다.

노동조합 회의에서는 격론이 벌어졌으나 결국 그 타협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다섯 명의 노동자가 해고돼 몇 년 동안 복직투쟁을 벌이느니 대의원 몇 자리를 내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의를 마치면서 노조 간부들은 지난 10년 동안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느라고 겪었던 어려움들을 떠올리며 눈물지었습니다.

노동조합 집행부를 구성할 때 회사는 또다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노조 간부 중에서 회사가 지목하는 사람을 제외시켜주면 전임자 수를 늘려주겠다는 것입니다. 회사는 구체적으로 노조 간부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전체 조합원 수에 비해 턱없이 적은 전임자 수를 늘리는 것이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노동조합의 대책회의에서는 또다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회사로부터 지목 받은 간부가 눈물을 흘리며 "현장 업무에 복귀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다른 간부들도 모두 따라 울었습니다. 현장으로 복귀한 간부는 노동조합을 가장 열심히 탄압하는 관리자 담당 부서로 배속됐습니다. 그런데도 그 노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노동조합을 떠나 현업에 복귀하는 것이 사실 너무 즐겁다. 40년 인생을 통해 배운 것보다 노동조합에서 2년 동안 배운 것이 더 많았지만, 노동조합 활동은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신물난다. 남아있는 동지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들과 가깝게 지내는 직원들은 절대로 진급이 안 되는 것이 이 회사에서는 오래 관행입니다. 인사과 직원들은 마치 군대의 보안대원처럼 다른 직원들 위에 군림합니다. 자신들은 월급의 몇 배나 되는 활동비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자랑을 즐겨 합니다. 그 사람들의 언행에는 우리 시대 가장 성공한 직장인이라는 자부심이 가득 차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인사노무 관리자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아직도 이런 일을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공감하는 직장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 노사관계는 절대로 동등하지 않습니다. 정치인이 단식을 하면 기자들이 단체로 몰려가고, 전직 대통령까지 찾아가 "단식하면 죽는다"는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다고 언론이 시시콜콜 보도합니다. 그러나 노동자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100일 넘게 고독과 싸우며 농성을 하고, 10년이나 묵은 해고 때문에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가 목숨을 건 농성을 두 달이나 하다가 그 굴뚝에서 새해를 맞아야 하는 일이 벌어져도 우리 언론은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노사 대립으로 국가경제가 위태롭다고 한탄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책임 전가에만 급급한 한국적 현실" 따위의 표현은 노사가 평등할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외국의 성공적인 노사 화합 사례를 소개하면서 "소유와 경영을 독점하려는 자본가나, 자기 권익만 찾는 노조에 새로운 영감을 던져준다"고 함부로 결론 맺을 일이 아닙니다. 양비론은 대부분의 경우에 옳지 않습니다.

시사자키 칼럼 하종강이었습니다.

2004. 1. 8

노동일꾼 하 종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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