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칼럼

[세상 읽기] 백혈병 산재 판결과 기울어진 법정 / 정정훈



서울고등법원은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황유미·이숙영씨의 항소심 판결에서도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삼성전자는 항소심 판결을 존중하고 수용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근로복지공단은 상고 여부를 검토하여 결정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제시하고 있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2007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한 지 7년이 지났고, 2011년 1심에서 산재 인정 판결을 받고도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여 다시 3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만약 근로복지공단이 또다시 상고를 제기한다면, 이는 신속·공정하게 업무상 재해를 보상하고 예방하여야 하는 공단의 존재 의의에도 반하는 것이다. 늦었지만 공단은 이제라도 판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이번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교대제 근무로 인한 과로·스트레스가 질병의 원인 중 하나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등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다만 법원이 함께 소송을 낸 3명에 대해서는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패소 판결을 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법원은 이들이 업무 수행 중 벤젠, 삼염화에틸렌 등 유해요인들에 노출되었을 가능성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노출의 수준이나 정도가 질병을 유발하거나 그 진행을 촉진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위와 같이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법원의 판단은 소송법상 ‘입증책임’을 근거로 한 것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은 재해와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를 노동자가 증명하도록 하고 있다. 직업성 질병의 경우, 그 인과관계는 전문적인 의학지식이나 임상실험 등을 통해서만 증명이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백혈병 등 직업성 암은 유해요인 노출로부터 발생까지 10년 이상의 긴 잠복기를 거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재 발생 시점에서 과거의 유해요인 노출 여부 및 노출량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반도체 공정의 특성상 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할 즈음에는 작업환경이 질적으로 변화하고 업무 관련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남아있지 않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김경미씨의 산재를 인정한 서울행정법원 판결은, 이런 점을 인정해 “발암물질 혹은 발암의심물질에의 노출 여부 및 그 정도를 더 이상 규명할 수 없게 된 것은 근무 당시 사용된 화학물질에 대한 자료를 보존하지 않거나 일부 자료에 대해서는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삼성전자에게도 그 원인이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

게다가 현대의학으로도 백혈병과 같은 직업성 질병의 원인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에게 인과관계를 입증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의 재활과 생존을 지원하는 산재보험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현행 제도는 노동자에게 ‘기울어진 법정’에서 싸울 것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기울어진 법정을 바로 세워야 할 일차적 책임은 정부와 국회에 있다.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하도록 한 헌법 32조에 따라 산업재해의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개인적 질병’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산재로 인정하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법원은 입증책임을 최대한 완화하는 방법으로 공평하고 정의로운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번 항소심 판결에서 인과관계가 부정된 3명의 사례에 대하여는, 유해성에 대한 입증의 정도를 완화해온 대법원의 판단을 기대해 본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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